위고비와 전동 알약 비만 치료의 미래
매년 연말 《Nature》나 《Science》와 같은 학술지, 혹은 《MIT Technology Review》 등 과학 전문지는 그 해의 주목할 만한 과학적 발견이나 혁신을 선정하곤 합니다. 돌이켜 보니 2023년에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더라고요. ChatGPT를 비롯한 생성 AI 모델, 관측 사상 기온이 가장 높았던 한 해,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 발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CRISPR를 활용한 고지혈증 치료, 말라리아 백신 등도 자주 언급됩니다.
물론 학술지나 매체마다 선정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다른 아이템이 꼽힙니다만, 의외로 많은 매체에서 GLP-1 수용체 작용제(GLP-1 receptor agonist, 이하 GLP-1 RA)에 기반한 비만 치료제를 꼽고 있습니다. GLP-1 RA는 원래 2형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되었다가 체중이 감소하는 '부작용'이 발견되어 비만 치료제로 전용되기 시작한 약물입니다. 《Science》에서는 2023년 최고의 혁신으로 단독 선정하기도 했고,[1] 《Nature》에서는 2023년의 인물로 GLP-1을 최초로 발견한 스베틀라나 모이소프(Svetlana Mojsov) 교수를 꼽기도 했습니다.[2]
1940년대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무지개 다이어트 알약(rainbow diet pill)은 암페타민을 비롯한 마약성 각성제가 주성분이었고, 여러 색깔의 다양한 알약은 각성제의 부작용을 억누르기 위한 대증요법으로 처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3] 더 과거로 올라가 1910년대에는 디니트로페놀(DNP)이 포함된 다이어트 보조제가 유행했는데 수십 명의 사망 사고를 낸 끝에 FDA에서 금지되기도 했고요.[4]
우리나라에서도 조금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다이어트 보조제 광고가 끝도 없이 쏟아집니다. 대개의 보조제는 별다른 효과 없이 비싸기만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제도 있습니다. 다이어트 한약의 주성분인 마황에는 에페드린(ephedrine)이 포함되는데 장기 투약시 급성심근경색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피트니스 업계의 음지에서 유통되는 다이어트 약물에는 이미 금지된 DNP가 섞여 있다는 소문도 있지요. GLP-1 RA의 출시 이전까지 비만학계는 위절제나 위우회술과 같은 비만대사 수술(bariatric surgery) 이외에는 안전하면서 장기간 유효한 감량 대책은 없다고 합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이니 효과가 검증되고 부작용이 적은 약물은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겠습니다.
GLP-1 RA는 2023년에 혜성처럼 나타난 약물은 아닙니다. 2005년에 파충류의 GLP-1을 모델링한 약물이 2형 당뇨병 치료제로 승인받은 것이 처음이지요. 2010년에는 제약 회사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 사에서 인간 GLP-1을 모델링하여 2형 당뇨병 치료제를 개발했는데, 2014년에 같은 약물이 비만 치료제로 처음 FDA 승인을 받았습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매일 한두 번씩 피하주사로 투여하는 방식이라 사용이 매우 불편했기에 큰 주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노보 노디스크에서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를 승인받으며 흐름이 바뀝니다. 세마글루타이드는 위고비(Wegovy)라는 이름으로 비만 치료제 승인을 받았는데, 1주일에 한 번만 주사를 맞으면 된다는 점에서 편의성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2021년의 임상시험에서 감량 효과를 입증[5] 한 데 이어, 일론 머스크나 킴 카다시안 등 유명인사들이 위고비를 처방받아 감량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단한 화제몰이를 했습니다. 위고비를 판매하는 노보 노디스크는 덴마크 회사인데요, 2024년 1월 현재 노보 노디스크의 시가총액이 덴마크의 GDP와 맞먹을 만큼 시장 규모가 커졌지요.
GLP-1 RA 연구는 비만 치료를 넘어 확장되고 있습니다. 노보 노디스크에서 발표한 다른 임상시험에 의하면, 세마글루타이드를 투약한 환자군은 위약군에 비해 5년간 심혈관계 질병 발병률이 20% 낮았다고 해요.[6] 최근에는 흡연자들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담배를 끊도록 하는 효과까지 발견되었습니다.[7] 현대 사회의 비만이 초가공식품이나 정제탄수화물에 '중독'되어 생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효과이지요.
개인을 압박하는 사회적 요소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비만이나 중독을 대증 치료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GLP-1 RA 약제는 '중독 사회'를 치료하는 최후의 약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병통치약이란 없는 법이지요. 우선 GLP-1 RA는 비쌉니다. 미국에서 한 달간 GLP-1 RA를 투약하는 데는 약 1,300달러가 필요합니다. 저소득층에서 비만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운 비용이지요. 위고비가 아직 우리나라에는 수입되지 않았습니다만 한국에서는 비만 치료 목적의 의약품은 일체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비용 부담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작년에는 위고비의 품귀현상까지 벌어졌는데,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유행한 탓에 체중 조절 목적으로 처방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정작 고도비만이나 2형 당뇨병 환자들이 처방을 못 받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또 드물지만 급성 췌장염을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췌장에 병력이 있는 환자들에게는 GLP-1 RA를 투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GLP-1 RA의 공백을 메울 대안 치료법이 있으면 유용하겠지요.
2023년 12월에는 꽤 흥미로운 비만 치료 '시술법'이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하버드 의대 연구진들이 진행한 이 연구에서는 돼지의 위에 특정 주파수로 진동하는 '알약'을 투여했습니다. 이 '알약'은 위벽의 수용체를 자극하여 위가 음식물로 가득 차 늘어난 것 같은 신호를 만들어냅니다. 진동 알약을 '투약'받은 돼지들은 대조군에 비해 40% 적은 사료를 먹었고 체중 변화에서도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고 해요. 알약의 진동은 실제로 내분비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험군 돼지들의 혈중 인슐린이나 GLP-1 농도에서도 차이가 관찰되었습니다.[8]
전동칫솔보다 가벼운 정도의 진동이라고는 하지만, 뱃속에 전자장치가 들어가서 30분 동안 진동하는 감각은 영 이상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1~2년 내에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 시험을 진행할 계획인데요, 뇌가 포만감 신호에 적응하여 감량 효과가 장기간은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어 추가 연구가 많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https://www.ibric.org/bric/trend/bio-news.do?mode=view&articleNo=9883467&srCategoryId=579&article.offset=135&articleLimit=15#!/list